발프로산 유발 췌장염, 왜 소아에서 더 위험한가
오르필 시럽의 주성분 발프로산나트륨은 뇌전증 치료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항전간제다. 정제를 삼키기 어려운 소아에게 시럽 형태로 자주 처방된다.
문제는 이 약이 급성 췌장염이라는 치명적 부작용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미국 FDA 블랙박스 경고와 한국 식약처 허가사항 모두에 치명적 출혈성 췌장염 위험이 명시돼 있다. 초기 증상에서 사망까지 빠르게 진행된 사례도 보고된 바 있다.
현재까지 가장 포괄적인 근거는 스위스 루가노 대학교 Bischof 연구팀이 2023년 Journal of Clinical Medicine에 발표한 체계적 문헌고찰이다. 1979~2023년 73편에서 총 125명을 분석한 결과, 66%인 83명이 소아였다.
발프로산 유발 췌장염 핵심 통계 (Bischof 등, 2023)
소아에서 발생 비율이 높은 이유가 있다. 어린아이의 간은 글루쿠론산 포합 능력이 미성숙해 반응성 독성 대사산물이 더 많이 만들어진다. 식약처도 “어린아이에게서 특히 위험하다”고 명시하고 있다.
특히 6세 미만, 발달장애나 신경학적 이상이 있는 아이, 다른 항전간제를 함께 쓰는 경우에 위험이 더 높아진다는 보고가 있다.
추정 발생률은 약 4만 명당 1건으로 드물다.
하지만 진단부터 사망까지 평균 7일밖에 안 걸린다는 점, 그리고 용량이나 혈중 농도와 무관하게 나타나는 특이반응이라는 점이 이 부작용의 본질적인 위험성을 보여준다.
발프로산이 췌장을 손상시키는 기전
정확한 기전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여러 연구에서 상호보완적 경로가 확인됐다.
가장 널리 인정받는 기전은 산화 스트레스다. 발프로산이 체내 항산화 효소 – SOD, catalase, glutathione peroxidase – 를 고갈시키면 활성산소가 과도하게 쌓이고, 이것이 췌장 조직을 직접 손상시킨다.
비교적 최근 밝혀진 기전도 있다. 2015년 피츠버그 대학교 소아과 Eisses 연구팀이 American Journal of Pathology에 발표한 실험 연구가 그것이다.
발프로산이 Class I HDAC(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를 억제해 선방세포 증식이 40~50% 감소하고, 췌장의 회복·재생 능력 자체가 떨어진다는 결과였다.
| 병태생리 기전 | 핵심 내용 |
|---|---|
| 산화 스트레스 | 항산화 효소 고갈 → 활성산소 축적 → 조직 손상 |
| HDAC 억제 | 선방세포 증식 감소, 재생 프로그래밍 지연 |
| 카르니틴 고갈 | 지방산 산화 장애로 에너지 생성 저하 |
| 독성 대사산물 | 4-en-VPA 등 간 대사 과정의 독성 산물 |
특히 주목할 부분은 HDAC 억제 기능이 없는 유사체 valpromide에서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HDAC 억제가 핵심 기전이라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결국 하나의 경로가 아니라 여러 메커니즘이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다. 개별 환자에서 어떤 기전이 우세하게 작동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도 이 부작용이 까다로운 이유다.
보호자가 놓치면 안 되는 소아 췌장염 경고 증상과 대처법
전형적 증상은 갑작스러운 복통, 구토, 복부 팽만, 발열이다. Werlin과 Fish가 2006년 Pediatrics에 발표한 소아 22명 연구에서 복통이 83%, 구토가 74%를 차지했다.
하지만 비전형적 발현도 적지 않다. 이 부분이 어쩌면 더 중요하다.
2020년 몬트리올 대학교 소아약리학팀이 보고한 2세 남아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아이는 배 아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기면과 축 처짐만으로 내원했는데, 리파아제가 1,200 U/L 이상이었다.
- 갑작스러운 윗배 통증이 지속될 때
- 구토가 멈추지 않을 때
- 갑자기 밥을 거부하거나 설명 안 되는 졸림
- 영유아·발달장애 아동의 갑작스러운 보챔 증가
▲ 말로 표현 못 하는 영유아나 발달장애 아동에서는 복통 대신 행동 변화만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 보챔 증가, 식사 거부, 활동량 감소 같은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배탈이겠지”라고 넘기면 치명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식약처도 이러한 증상 발생 시 신속한 의학적 평가가 필요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진단은 혈청 리파아제 검사가 핵심이다. 아밀라아제보다 민감도가 높고, 소아 22명 연구에서 리파아제는 전원이 정상 상한치 3배를 초과한 반면 아밀라아제는 31%에서 유의하게 상승하지 않았다.
의심 증상 발생 시 대처 흐름
여기서 절대 빠져서는 안 될 원칙이 있다.
보호자가 임의로 약을 끊으면 간질지속상태라는 또 다른 응급 상황이 생긴다. 증상이 의심되면 약을 들고 곧바로 응급실로 가야 한다. 확진 후에는 전문의 판단 하에 레베티라세탐 등 대체 항전간제로 전환하게 된다.
발생 시점 중앙값은 투여 시작 후 11개월이지만, 최소 1주일부터 최장 19년 후까지 보고 범위가 넓다. “오래 먹어왔으니 괜찮겠지”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한 번 췌장염이 확인된 환자에게 발프로산을 다시 쓰면 84%에서 재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