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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에게 배우는 건신건정의 행복 철학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행복

광교 엘포트에 들러서 순두부 찌개 혼밥을 교보문고에서 인문학 코너를 어슬렁거리다 쇼펜하우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두 권을 집어들고 테이블에 앉아서 슥슥 넘기며 읽어보았다.

철학이라는게 어려워서 그렇지 인생 자체를 사색하고 해답을 얻는 것에만 몰두한 철학자들이 남긴 업적들은 배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권은 쇼펜하우어의 글 자체를 실어놓은 아포리즘이고, 오른쪽은 저자가 쇼펜하우어 철학을 쉽게 풀어서 마흔 전후 인생고민을 하는 독자를 대상으로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치열하게 살아온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는 삶 자체가 철학인 동시에 모순이었다. 그는 당대에 강의를 위해 입바른 소리를 하던 성선설 학자들과 달리 매우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태도였다. 이를 나타내는 유명한 말이 있다.

태어나지 않는게 최선 태어났다면 최대한 빨리 죽는게 차선

뭐야이게 ㅋㅋ 삶과 죽음, 인간의 행복과 고통을 탐구하는 철학자가 왜살어 그냥 다죽어 이러고 있으니 어이가 없긴 하다. 하지만 그의 이후 행적은 언행불일치의 극을 보여준다.

항상 주변을 불신하고 경계해서 이발사에게 면도를 맡기지도 않았으며, 화재를 걱정해서 2층에서 잠을 자지 않았고, 탄환까지 넣어둔 권총을 침대 옆에 놓아둘 정도였다. 1831년 베를린 콜레라 창궐시 헤겔은 끝까지 강의를 하다 전염병에 죽은 반변, 쇼펜하우어 본인은 살기 위해 베를린을 탈출했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인간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던 자신의 속에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깨달았을지 모른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위한 계기가 되었을지도.

행복하지 않았던 금수저 쇼펜하우어

사실 그가 평생을 산책하면서 사색이나 하고 철학 연구만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유산 덕분이었다. 상인인 아버지 덕에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부부관계가 좋지 않아 가정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어머니는 사교계에 치중하면서 그야말로 전형적인 결손가정에서 자란 아이처럼 비관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성인이 되고 소송으로 어머니에게 유산의 1/3을 받아내면서 그걸로 평생 부족함 없이 살면서 철학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왜 살아야 하는가, 죽음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답을 얻고자 했다.

금전적인 부족함은 없었지만 삶에 대한 도전과 자아실현에 있어서는 쇼펜하우어의 인생 자체가 실패와 고통 투성이라서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철학으로 승화시켰다.

그래서인지 금수저 철학자가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일 법도 한데, 오히려 시궁창을 겪으며 밑바닥 서민의 마음까지 잘 이해하는 듯한 현실적인 철학을 제시했다. 뻔한 탁상공론이 아니라 정말 우리네 삶과 닮아있고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느끼는 점을 공감하고 나아가야 할 길을 비춰준다.

비관으로 시작해서 비관에 대한 비관을 깨우치며 고통스러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한 결과이다.

내 몸부터 잘 아는 것이 철학의 시작

유복하지만 불우한 가정 환경, 이렇다 할 업적을 얻지 못하고 진로도 방황, 그런 사람중에 우울증에 시달리다 못이겨낸 케이스가 많은데 쇼펜하우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가 우울증 걸렸을 때 하는 행동과 매우 닮았다.

1) 혼자 정해진 시간에 산책 : 산책이 여가시간이 아니라 직장과 같이 일종의 업무시간처럼 여겼다. 중요한 일과이자 습관이며 이 때 생각해야 할 어려운 과제들을 준비해나가서 걸으며 사유했다.

2)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 내가 이 블로그의 이름으로 지은 건신건정의 의미이다. 쇼펜하우어도 건강한 생활은 육체 정신 양쪽이 조화로워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매일매일 피곤하다. 건강하고 활기찬 생활을 지속적으로 영위하려면 대가를 치뤄야 한다. 그 대가란 바로 좋은 습관을 지키는 것이다. 좋은 습관은 어떻게 얻느냐? 인내다.

3) 너 자신을 알라 : 인내라는 것이 무턱대고 참는 것이 아니다. 면요리 안먹으면 못사는 사람한테 당장 밀가루를 완전히 끊으라고 하면 그만한 고통이 없을 것이다. 결국은 못버티고 무너져서 폭식하는 날이 온다.

인내는 무조건 참는게 아니라 내 몸이 견딜 수 있는 범위를 깨닫고 그안에서 유지하는 것이다. 무모하게 버티거나 남들을 따라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이렇듯 나에게 맞는 몸과 마음이 불쾌해지지 않는 기준을 정립하고 오래 지키다보면 평범한 생활이 고유 재능으로 인정받는 날이 온다.

훌륭한 성과를 낸 인물들의 성공사례를 보면 하나같이 습관을 중요시하는데,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던지 아니면 하루 시작전 얼마간의 시간을 자신에게 할애한다던지 그런 이야기를 봤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아웃풋이 하루아침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먼저 그렇게 스스로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노력부터 하고 그걸 매일매일 지속할 때 수많은 시간이 쌓여서 남과 차이가 벌어지게 되고 놀라운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철학자가 무슨 삶과 죽음 같은 뜬구름잡는 소리만 탐구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몸 상태부터도 정확히 관찰하고 알고 있는거네. 왠지 다이어트를 한다고 해도 잘했을 것 같다. 내 기초대사량과 식욕과 수면시간 운동량, 먹는거 칼로리 정확하게 파악해서 조금씩 해나가는 스타일일듯

우울을 이겨내는 방법

지치면 냉정한 성찰이 불가능하고 하루를 되돌아볼 때 타인에 대한 분노 자신에 대한 자괴감, 우울이 밀려온다. 이게 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럴 땐 그냥 푹 자는게 최고다.

건강이 행복의 90퍼센트를 좌우한다. 왕이든 거지든 명랑하게 웃을 서 있는자가 행복한 사람이다. 건강한 정신을 위해선 몸 상태도 좋아야 한다. 본질은 유기물인 인간은 몸을 움직이고 운동을 꾸준히 해야한다.

삶이란 무엇인가 죽는다는건 어떤 의미인가 이런 질문만 하는게 아니라, 당장 오늘 사람관계에서 기분이 안좋고, 몸이 피곤하니 정신도 사나워지고. 이런 일상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도 다 인간 본질에 대한 이해하고픈 탐구이며 그게 쇼펜하우어 철학의 시작인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고난 후 그는 사회에 만연한 우울증의 원인과 실태도 정확히 짚어냈다.

기술의 발달이 인간에게 안락을 가져다주고 우울증을 야기했다는 것. 우울을 빌미로 나태해지면서 불감증이 만연해진다. 우울하니까 아무것도 안해도 괜찮겠지. 그러면서 나만 힙들고 외롭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우울의 끝에서 분노와 열광이 탄생한다.

인간 하나에 대한 고찰을 이루면 인간이 모여있는 세상과 사회를 보는 눈도 길러지나보다. 인문학과 철학의 필요성을 좀 더 느낀 순간이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쇼펜하우어는 3 단계의 행복이 있다고 여겼다.

  • 1단계 : 생리적 즐거움 먹고 싸고 자고
  • 2단계 : 육체적 즐거움 운동 사냥 산책
  • 3단계 : 정신적 즐거움 사유 예술 독서

정작 본인은 금수저라 먹고 싶은거 영양분 골고루 잘 먹고 일도 안하고 놀고 먹으니 잘 자고 쉬고 할 수 있었다. 운동도 다니고 사냥도 나가고 혼자 산책하면서 생각해가지고 그걸로 책쓰고. 나아가 예술과 독서를 통해 배우고 본인의 지적 성취와 업적도 성장시켰다.

지금 시대의 우리가 볼 땐 이런 개꿀이 있나 싶다. 아닌가? 그냥 놀아도 되는데 굳이 머리아픈 철학 탐구를 평생 하면서 살았다는 점이 범인의 수준이 아닌 것 같다. 그에게 행복이란 인간에 대한 사유 즉 목표를 향해 철학을 연구하는 과정 그 자체였던 것이니.

철학자니까 당연히 죽음도 다룬다. 인생에서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죽음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에서 반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는 오래사는 장수를 일종의 징벌처럼 여긴다. 몇 대를 이어 살아남은 사람의 풍부한 이야기도 골동품 가게 진열장에 먼지쌓인 상품, 듣는 사람한테는 하품나오는 싸구려 동화책이라 치부했다. 단순히 오래 사는 것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행복이란 단어를 제거하면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돈벌어서 부자되자 말고 가난을 제거하자는 말로 바꾼다.

행복은 저 앞에 꽂혀있는 목표점의 깃발이 아니다. 거기에 가는 과정에서 의지와 실천을 내딛는 과정에서 마시는 물 한 모금 같은 것이다. 성숙하게 되면 성숙하기까지의 과정 전체가 행복했음이 입증된다.

성숙은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생각하는 삶을 살 때 행복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이 많고 관심사가 많을수록 예민하고 상처받기도 쉬운데 어떤게 행복한 삶인지는 쇼펜하우어조차 단언하지 못했다.

왜냐면 고대 선지자 중에도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다. 티벳이 가장 행복지수가 높다는 뉴스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고 살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인간의 삶인가에 대해선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깐.

사리 분별력을 가지고 인생을 주도할 것인가, 아니면 생각을 좀 내려놓고 마음 편하게 살 것인가. 선택과 정답은 각자가 찾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우리는 매일 남과 비교하고 허세로 똘똘두른 가짜 행복을 쫓는 고통과 보이지 않는 허상같은 진짜 행복을 쫓는 고통 모두에 시달리고 있다. 산은 정상에 올라야 비로소 내리막이 보인다. 인생의 중반쯤인 마흔 전후에 죽음을 생각하게 되면서 비로소 인생에 대한 깊은 질문도 하게 된다.

산을 어떻게 오르고, 어떻게 내려갈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